제주 CBS

한여름 장마가 끝나고 8월로 접어들 무렵 제주의 남쪽 어두운 숲에는 버어먼초가 피어난다. 버어먼초는 언뜻 보면 흔히 보는 꽃의 모습이 아니어서 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비롭다. 오히려 버섯에 가까워 보인다. 부엽토 위에 하얀색 줄기를 올리고 줄기 끝의 꽃잎은 노란색 루즈를 바른 것이 전부이다. 식물체 전체가 흰색으로 일반적인 식물체의 녹색을 찾아 볼 수 없다.

식물들은 일반적으로 엽록소를 가지고 있어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어떤 식물들은 광합성을 하지 못해 다른 대상물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이들은 스스로 양분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식물에 기생하기도 하고 부엽토나 동물의 사체에서 양분을 흡수하기도 한다. 각각 기생식물, 부생식물이라 부르는데 식물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볼 수 있다.

버어먼초는 부엽토에서 양분을 얻는 부생식물에 해당한다. 부생식물에는 버어먼초 말고도 나도수정초, 구상란풀 등이 있다. 버섯이 땅속에서 양분을 흡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기물이 많은 부엽토에서 양분을 얻는다. 광합성을 하지 못하여 썩은 나뭇잎에서 양분을 얻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버어먼초를 보려면 낙엽이 오래 쌓인 어두운 숲속으로 가야 한다.

버어먼초는 외국 이름이어서 외국에서 들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우리나라의 자생식물이다. 일본에서도 자라지만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제주에만 있고 제주에서도 남쪽 계곡 주변 오래된 숲에서만 자란다. 더욱이 개체수가 많지 않아 환경부 해외반출 승인대상 생물자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기도 한 식물이다. 키는 5~12cm로 곧게 자라며 전체가 흰색이다. 줄기에는 비늘모양의 뽀족한 잎이 달려 있으며 줄기 끝에는 1~5송이의 꽃이 모여 핀다.

또 버어먼초를 닮은 애기버어먼초라는 식물도 있다. 애기버어먼초도 버어먼초와 비슷한 시기에 꽃이 피기도 하거니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다. 버어먼초와 달리 개체수가 많은 편이어서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버어먼초 보다 키가 작아 커봐야 5cm 정도이고 꽃도 버어먼초 보다 많아 6~9송이 정도 달린다. 또 분포지역도 넓어 동남아 일대까지 자라는데 제주도가 북방한계선인 셈이다.

버어먼초라는 이름은 학명(Burmannia cryptopetala Makino)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속명 Burmannia에서 온 것으로 네덜란드 식물학자 Johannes Burmann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종소명 cryptopetala는 ‘숨어있는 꽃자루’라는 뜻이라고 한다. 깊은 숲 속에서 잘 발견되지도 않을뿐더러 원시적이고 신비한 모습으로 피어나는 버어먼초를 본다면 이름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버어먼초를 다른 이름으로 석장(錫杖)이라 부른다. 석장은 스님들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말한다. 기둥은 나무로 하고 윗부분에는 보통 여섯 개의 고리를 달고 있다. 고리는 움직일 때 흔들리면서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는데 그 소리를 듣고 동물들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 살생을 막는다는 배려가 들어있다고 한다. 실제로 버어먼초를 보면 특별한 기관이 없이 흰 줄기위에 꽃이 달린 것이 지팡이처럼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버어먼초를 볼 때마다 늘 신비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온 대지가 푸르름으로 가득한 시기이지만 퀴퀴한 낙엽 썩는 냄새가 나는 어두침침한 곳에서 맑은 모습으로 새 생명을 피워 올린다. 그리고 엎드리지 않고서는 너무나 맑고 투명한 속내를 자세히 볼 수 없다.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눈 맞춤을 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이야기 하는 듯하다. 그러나 식물 애호가들이 늘어나면서 버어먼초도 수난이다. 좀 더 좋은 사진을 담으려고 낙엽과 부엽토를 쓸어내는 바람에 점점 자생지와 개체수가 줄고 있다. 식물을 좋아하는 것이야 말릴 수 없지만 식물에 대한 이해와 보호에 관심을 조금만 더 갖는다면 버어먼초를 오래오래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